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


독일어는 왜 배우게 되었나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어떤 교양 과목을 선택할지 고민하다가, 초급 독일어를 들었던 것을 계기로 독일어 회화 수업을 신청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초급 독일어를 들었던 경험이 있으니 성적을 좀 더 쉽게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4주 차가 되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초급에서 배운 독일어 알파벳과 기초 문법을 3주 만에 모두 다루고 바로 대화 스크립트를 읽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배웠는데 말이 안나온다?

독일어 ‘회화’ 수업이라고는 하지만 진도가 너무 빠른 것 같아, 도치가 들어간 문장이나 너무 어려운 문장들은 자체 패스하며 들었다. 중간시험도 독일어를 공부한 적이 있다면 누구나 외웠을법한 die der das 변형과, 중요해보이는 단어 몇개 (Mutter, Vater 등)를 외워갔지만, 시험은 웬걸,,, 문법은 한 문제였고 나머지는 모두 ‘7문장 이상으로 자기소개를 써보라’는 식의 유형이었다. 그래도 어찌저찌 아는 단어 총동원해서 써냈는데 교수님이 보시고는, 이건 이렇게 쓰면 안되고 저건 다른 간단한 표현이 있고, 하며 실시간으로 고쳐주시더니 다시 써오라고 하셨다. 이렇게 프리한 시험장은 또 처음이었다.. 다른 학생들도 시험장 안에서 교수님께 몇번이나 답안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자리로 돌아가 답을 수정해서 냈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왔다갔다하는 게 귀찮았는지 연필과 지우개를 같이 들고 가서 피드백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고쳐서 내기도 했다.

와중에 내가 고칠 게 제일 많아서 시험장에 마지막까지 남았다 ㅋㅋ. 교수님과 같이 퇴실해서 복도를 걷고 있는데 교수님이 내게 시험이 어려웠냐 물으셨다. 나는 솔직하게 ‘수업에서 배운 문법과 단어를 외운다고 외웠는데 설마 완전한 문장을 만들게 시킬 줄 몰랐다’고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내가 독일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한국인들은 꼭 그렇게 die der das를 안다고 자랑하더라, 라며 문법은 언어의 일부일 뿐이고 그것만 안다고해서 독일어로 소통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

역설적이게도 그날 언어 과목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뿌듯했다. 돌이켜보면, 언어는 소통의 수단일 뿐이라는 걸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단어와 문법을 따로 아무리 외워도 그걸로 문장을 구성해서 표현할 수 없다면 소용없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그 시험에서처럼 실제로 내가 원하는 말을 만들어보는 연습을 한다면 이제는 정말 그 언어로 대화라는 걸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갔다.

말을 잘한다는 것

컴퓨터 전공 과제를 하다보면, 과제를 통해 뭔가 새로운 지식을 얻어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고 정석대로 스켈레톤 코드를 따라 완성해서 점수만 얻어가는 사람이 있다. 전자의 경우 간단한 과제 하나에도 오 그럼 이런 경우엔 이렇게 적용해볼 수 있겠네? 하면서 시간을 버리는,, 꽤나 시간을 투자하는데, 그렇게 얻은 지식이 투자한 시간에 비해 항상 의미있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그 하나하나가 쌓이고 쌓여서, 나중에 다른 프로젝트를 할 때 응용력 부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내 생각엔 언어도 좀 그런 것 같다.

독일어 기말 시험은 파트너 한명이랑 같이 치르는 말하기 시험이었고, 질문 몇개를 뽑은 뒤 해당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답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주어진 과제만 착실하게 했던 터라 과제로 작성해봤던 표현으로만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그게 딱히 문제가 되진 않았지만, 옆에 앉은 파트너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잘했다. 매주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알려주신 것 말고도 적극적으로 새로운 표현을 알아보고 써보려 노력하더니, 기말시험에서 본인도 긴가민가하는 눈빛으로 말을 하긴 했지만 어찌됐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표현해냈다. 문법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문장인지는 몰라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모두 말로 늘어놓을 수 있다는 것은 말을 잘 한다고 인정받기에 충분했다.